(17)이인직의 ‘혈의 누’…최초의 신소설을 둘러싼 논의

방민호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일제 ‘정치소설’ 이식이 아닌 옛것과 새로운 것의 접합이었다

청일전쟁에 종군했던 프랑스 화가 조르주 비고가 그린 풍자화. 당시 조선의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청일전쟁에 종군했던 프랑스 화가 조르주 비고가 그린 풍자화. 당시 조선의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현대소설사의 첫 장을 이인직(1862~1916)의 <혈의 누>에 관한 논의로 시작하는 관례를 벗어나기는 어렵다. 물론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는 그보다 6개월 전에 <일념홍>이라는 신소설이 비슷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밝혀 놓기도 했다. 그럼에도 최초의 신소설이라는 <혈의 누>의 이미지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은 국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잘 알려져 있다.

“일청전쟁의 총소리는 평양 일경이 떠나가는 듯하더니, 그 총소리가 그치매 사람의 자취는 끊어지고 산과 들에 비린 티끌뿐이라.”

한 원로 학자는 이 문장을 가리켜 비상한 시대 인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청일전쟁”이라 부르는 것을 이 소설의 작자 이인직은 “일청전쟁”이라 했던 것, 이렇게 중국과 일본의 위치를 바꿔 부른 것만큼 극명한 세계사 인식 전환은 없었다는 뜻이리라.

맞다. 1900년, 서른여덟 살이나 되는 늦은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정치학교에서 공부하고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 통역으로 전쟁터를 발로 따라다닌 이인직이었다. 조선 사람 누구보다 서구가 패권을 쥐고 일본이 그 ‘흉내’를 내는 세계사의 전환을 실감나게 맛보았을 그였을 것이다. <혈의 누> 첫머리의 ‘명문장’은 그래서 비로소 가능했을 것이다.

이 청일전쟁은 일본 쪽의 비판적 역사가들에 의해서는 일본이 군국주의로 나아가는 발판 역할을 한 것으로 기억된다. 이 승전의 단맛으로 인해 남을 유린하고 자신마저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전쟁 ‘기계’가 탄생했다고도 본다. 비평가 쓰루미 슌스케(鶴見俊輔, 1922~2015)가 어떤 책에서 “15년 전쟁기”라 일컬었던, 1931년 만주전쟁부터 1945년 태평양전쟁 패전까지의 ‘비극’이 이미 청일전쟁 때부터 잉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국주의자들, 제국주의자들, 또 그들의 힘에 빌붙은 이들에게 이 전쟁은 우승열패의 현장에서 일본의 기세를 보여준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오도된 길로 나아가는 시발점이 된 이 전쟁의 현장은 바로 이 나라 한반도였다. 승전을 기념하여 시리즈 엽서를 만들기를 좋아했던 일본 사람들은 이 나라 아산만 앞 풍도 해전에서 시작되어 성환 전투를 거쳐 평양 전투에서 승기를 거머쥔 청일전쟁의 현장들을 화려한 채색판화들로 남겨놓았다.

일본에는 청일전쟁 승전의 기폭제가 된 평양 싸움을 이인직은 조선인답게 아비와 어미와 딸이 서로를 잃고 뿔뿔이 흩어진 비극의 현장으로 그려놓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혈의 누> 속 김관일과 최씨 부인과 옥련의 이야기다. 또한 이인직은 오늘에까지 널리 알려진 악명 높은 친일파답게 이 전쟁을 일본 쪽은 전쟁 중에도 국제법을 지키는 것처럼 정의롭게, 청나라 쪽은 철환에도 독을 넣는 악한 세력으로 묘사했고, 특히 이 소설의 주인공 옥련으로 하여금 일본군 군의에 의해 구조되도록 했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는 평양 전투의 아수라장에서 부모를 잃은 옥련이 오사카로 옮겨져 자라나고 나중에는 구완서라는 청년과 함께 미국 워싱턴에까지 유학하며 거기서 극적으로 아버지를 만나고 고국에 있는 어머니와도 만날 것을 기약할 수 있도록 짜여졌다.

이 스토리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청일전쟁을 일청전쟁으로 고쳐 부르는 ‘오도’된 시대감각의 산물이 이 나라 최초의 신소설, 즉 근대소설이라는 ‘사실’을 모종의 불쾌한 감정 없이 수긍하기에는 간단치 않다. 이 불쾌는 어떤 석연찮음에서 기인하는 것인바, 이 감정의 ‘심연’을 헤쳐 볼 필요가 있다.

[김성곤·방민호의 현대문학 명장면 20] (17)이인직의 ‘혈의 누’…최초의 신소설을 둘러싼 논의

<혈의 누>에 늘 따라붙는 ‘최초의 신소설’이라는 수식어, 그리고 또 하나, “일본 정치소설의 결여 형태”라는 말. 이 문제를 먼저 검토해 볼 수 있다. 우선 그 최초라는 용어는 근대문학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를 하나의 기점 논의로 환원시킨다. 묻는다. 한국 근대문학은 도대체 어느 지점에서 시작되었느냐. 이 물음은 한국에서의 근대 기점론에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한국에서 근대는 과연 어느 시점에 ‘촉발’되었느냐는 것이다.

내재적 발전론과 이식론의 대립으로 지칭되기도 한 이 물음은 지금은 마치 이미 판명된 것처럼 취급된다. 내재적 발전론은 촌스럽고 고루한, 주관적 환상과 믿음에 기초한 민족주의적 발상의 산물이요, 비록 바람과는 다를지언정 사태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지식인이라면 이식이 결국 정답이었음을 수긍해야 한다는 것이다.

‘식민지를 거쳐서야 한국사회가 비로소 근대화될 수 있었음을 긍정하라?’ ‘1876년(개항)에야, 1894년(갑오경장)에야, 1910년(경술국치)에야, 아니, 1910년에서 1918년에 걸친 일제에 의한 토지조사사업에서야 근대화의 행정이, 그 수레바퀴가 구르기 시작했음을! 이렇게 볼 수 있어야 비로소 과학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는 하나의 기점, 하나의 사건으로 환원해 보지 않고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또 그것은 정치경제학적 척도로 환원하지 않고 여러 지표들(indices)에 의해 중층적으로 측정되어야 할 복합적 실체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 순간, 근대로의 이행은 일찍이 조동일이 논의했듯 긴 이행적 과정을 거느린 것이 된다. 그는 이 근대 이행을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양란 이후부터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고, 특히 1860년의 동학 창시를 중시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1800년대 초의 박해와 순교들도 간과할 수는 없다. 서학의 도입에서 동학의 창시에 이르는 기간은 특별히 참고될 필요가 있다.

근대적 사유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물질적 현상들에 의해 혹은 뒷받침되고 혹은 촉발되었는가는 여전히 탐구의 대상이다. ‘최초’에 관해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근대가 에디슨의 전구는 아닌 다음에야 이 ‘최초’를 만든 작용력들을 더 넓고 깊게, 복합적으로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 “결여 형태”라는 것에 대해서도 심문해 보아야 한다. 이식론의 승리를 확신하고 이를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승격시킨 논의들은 서구적 ‘특수’를 ‘보편’으로 상정하고 비서구적 근대를 그것의 과잉 또는 결핍으로 간주하는 인식틀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한국의 근대는 서구적 근대, 또 아서구적(亞西歐的) 근대로서의 일본적 근대를 이식하고 모방한 것이되 넘치거나 모자라게 함으로써 볼썽사납게 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동양적 전근대는 버려져야 마땅한 것이었으며, 버려졌고, 그 불모의 황무지 위에 서양적 근대는 마치 식물학적인 트랜스플랜테이션(transplantation)처럼 옮겨 심어졌던바, 바로 그렇게 불모지에 착근되었기에 정상적일 수가 없고, 정상적일 리가 없으며, 따라서 과잉과 결핍의 이중적 병증을 갖지 않으면 안되며, <혈의 누>가 바로 그 유력한 증거 가운데 하나다.

소설가 이인직

소설가 이인직

이식을, 그 흉내내기를, 그 과잉과 결핍을, 그 병적 징후를 더 많이, 더 냉철하게 적발할수록 국문학사를 정확히 아는 것이라면 국문학은 차라리 ‘자학사관’의 집결소가 되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옛날에, 임·병 양란을 거친 16~17세기에 이 전쟁들의 파괴의 영향으로 좀 더 변모된 전란소설 양식이 나타났다. 많은 고전소설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논의하는 바에 따르면 조선 전기의 전기소설 양식, 그러니까 김시습(1435~1493)의 <금오신화>의 다섯 이야기(‘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용궁부연록’, ‘남염부주지’) 같은 기이한 만남과 헤어짐의 이야기들에 전란이 개입한다. 그럼으로써 소설은 이제 ‘전란으로 인한 가족의 헤어짐과 다시 만남’이라는 플롯을 반복적으로 변주하게 되니, ‘최척전’, ‘주생전’, ‘김영철전’ 같은 전란소설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 소설들에서 지아비는 지어미를 잃고 중국과 일본과, 심지어는 베트남 등지로 떠돌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국경을 넘나든다. 이 ‘이산’과 ‘월경’의 이야기들을 통하여 작가들은 두 가지를 말했다고 한다. 하나는 전란의 참상과 민중들의 고난이요, 이것이 이들 소설에 리얼리티 효과를 부여했다. 다른 하나는 이들 전쟁이 모두 일종의 국제전쟁이었고 이 와중에 중세적, 봉건적, 왕조적 질서가 위기에 처했으며, 이 때문에 지식인들, 이 한문단편소설의 작가들은 위기의 극복을, 새로운 국제질서를, 변화와 개혁을 꾀했다.

이 동아시아의 소설적 전통의 맥락, 즉 중국에도 있고 조선에도 있으며, 일본에서도 그 공통의 플롯을 찾아볼 수 있는 전란소설 양식에서, 필자나 다른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인직의 <혈의 누>의 ‘개신(改新)’이 나타났다.

그는 ‘전란으로 인한 가족의 이산과 재회’라는 전통적 플롯에 ‘정치소설’이라는 영국, 일본의 양식을 접합시켰으며, 국문 한글이라는 한국적 소설 특유의 표현 매체를 수용, 한문단편소설 양식의 플롯을 국문소설 양식으로 안착시켰다. 청일전쟁은 <혈의 누> 속의 김관일, 최씨 부인, 옥련을, 조위한(1567~1649)의 ‘최척전’ 속의 최척과 옥영과 그의 아들들이 왜란과 만주 정세의 변화 와중에서 헤어졌다 새로 만나게 했듯이, 그렇게 운명 지웠다.

방민호 |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방민호 |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이인직은 서양과 일본이 득세하는 새로운 시대 전환을 꿰뚫어 보았으나, 백성들의 참상보다 시세를 중시하는 왜곡된 현실 의식으로 말미암아 민중의 참상을 바로 보지는 못했으며, 유학을 통한 새로운 지식 습득의 필요를 주창했으되 주권의 위기를 자신의 출세의 발판으로 삼았다.

옛것과 새로운 것, ‘안’의 것과 ‘바깥’의 것을 접합시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이 신소설의 국면에 왜곡된 의식이 스며들어 있었다는 것. 한국현대문학의 기구한 운명을 대변하는 현상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렇다 해도 그런 이인직조차 옛것과 새로운 것, 낯익은 것과 낯선 것의 접합이 아니고는 새로운 창조를 이끌어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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