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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맹목에 갇힌 정신, 한 걸음 비스듬히 보아야 자유로워진다

안재원 |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비스듬히 서기’의 또 다른 의미

미카엘 부르게르(Michael Burghers)가 1682년에 그린 루크레티우스의 초상.

미카엘 부르게르(Michael Burghers)가 1682년에 그린 루크레티우스의 초상.

“그건 공부라는 활동 자체가 기쁨의 원천이기에 비롯되는 즐거움이다. 사회가 나를 버겁게 해도 공부함으로써 기쁘게 되고, 시대가 나를 속여도 공부함으로써 기껍게 되는 즐거움이다. 그런 즐거움은 권력의 유무나 재력의 과다, 생로병사 등과 무관하다. 이런 즐거움을 ‘나’ 안에 갖추자는 제언이다. 그것이 비스듬히 서서도 지치지 않고서 버텨내며 살아냄의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김월회의 말, 경향신문 2016년 12월30일자 21면)

비스듬히 서서 즐기자고 한다. 한가한 소리로 들릴 것이다. 요즘 돌아가는 시류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말이기에.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럴 수는 없겠지만, 비스듬하게 서서 즐기는 이가 몇 사람 정도는 있었으면 한다. 온종일은 아니어도 몇 분 혹은 몇 초 만이라도 비스듬히 서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바야흐로 ‘~빠’ 세력과 ‘~까’ 세력 사이의 오고 가는 말의 전쟁을 봐야 하는 선거 시즌이 돌아왔다. 지지하는 정치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맹목에 가까울 정도다. 한 걸음 비스듬히 서서 말과 사람, 말과 감정, 주장과 세력을 한 번쯤은 떼어 놓아 보자고. 물론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정신이 맹목의 상태에서 벗어날 때 가능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의 정신을 맹목의 동굴에 가두고 있는 힘들도 결코 만만치 않은 것들이기에 하는 말이다.

요컨대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 말했다는 4대 우상(종족, 동굴, 시장, 극장)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남이가”로 대표되는 지역감정, 정치인들을 향한 ‘팬덤(fandom)’ 현상,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인 물신주의, 질적인 성숙이 동반되지 않은 양적 성장주의, 그럴싸하게 포장된 이미지 등이 우리의 정신을 가두고 있는 맹목의 감옥을 구성하는 기둥들일 것이다. 어느 것 하나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무튼 근대 국가의 형성(nation building)이 이렇게 어렵다. 생존에 필요한 물적 성장도 그렇지만, 생활을 누리는 데에 요청되는 정신적인 성숙은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그런데 정신이 맹목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이 계몽이다. 이와 관련해, 계몽으로 가는 길의 하나로 ‘비스듬히 서서 즐기자’는 김월회 선생의 제안은 두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편으로, 혼자 깨어나는 것이 계몽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럿이 함께 깨어나 있는 것이 계몽이니까. 다른 한편으로, 정치 세력 사이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 즉 정치권력의 이동도 계몽은 아니기 때문이다. 집단의 성숙을 목표로 하고, 그래서 계몽은 어느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고 오랜 기간에 걸친 축적의 시간과 경험을 전제로 요구하는 것이 계몽이다. “지치지 않고 버텨내며 살아”내자는 말에 십분 동의한다. 성숙의 나무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으려면 어쨌든 기다림과 인내가 요청되기에. 비스듬히 서야 한다고 한다. 일리 있다. 이에 힘을 실어 줄 증인을 부르겠다.

■ 비스듬함이란 아무것도 아닌 무엇일 뿐

바로 에피쿠로스(Epikuros, 기원전 341~271년)다. 맹목에서 정신을 해방시켜주는 길로 비스듬함을 제시한 사람이기에. 루크레티우스(Lucretius, 기원전 98~55년)가 전해주는 말이다.

라틴어로 학문하기의 모범을 보여준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1483년 지롤라모 디 마테오의 필사본).

라틴어로 학문하기의 모범을 보여준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1483년 지롤라모 디 마테오의 필사본).

“원자들이 아래로 똑바로 허공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무게 때문에 움직일 때, 규정을 받지 않은 시간과 규정을 받지 않는 장소의 공간에서 약간의 벗어남이 생긴다는 것을 말이네. 이를 자네가 단지 약간 이동된 움직임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벗어남이 말이네. 만약 원자들이 벗어나지 않는다면, 모든 것들은, 빗방울들이 그러하듯이, 깊은 심연의 빈 허공으로 수직으로 떨어져 버릴 것이고, 따라서 원자들에게는 어떤 충돌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고, 어떤 부딪힘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결론적으로 자연은 어떤 것도 생성시키지 못했을 것이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제2권, 216~224행)

우주의 생성 원리가 바로 비스듬함인 셈이다. 라틴어는 ‘declinare’다. 뭔가 기울어 있다는 뜻이다. 일체의 목적과 규정이 없는 상태에서 원자의 무게 때문에 생겨나는 움직임에 따라서 어떤 외적인 제한과 조건이 가해지지 않은 진공의 공간에서 생겨나는 즉 원자 자체의 물리적 힘 때문에 일어나는 물리적 힘 자체의 혹은 ‘무-규정적’ 혹은 ‘무-목적적’ 운동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원자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무엇이 아니라고 한다. 그 움직임도 다른 외적 요인이나 힘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그것에 접근할 때는 그 자체의 움직임에 주시해야 한다. 그것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nihil) 움직임이고 다만 자신의 무게 때문에 약간 빗겨나는 것이고 벗어나는 무엇이다. 따라서 비스듬함 개념은 그 자체로는 어떤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는 무엇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비스듬함” 개념은 그 자체로 아주 대단한 비밀 혹은 우주를 설명하는 엄청난 비결을 지닌 무엇이 결코 아니라는 얘기다.

■ 맹목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방법

반전은 지금부터다. 세계의 근대화에 루크레티우스의 “비스듬함”과 같은 생각이 나름 큰 영향력을 주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린블랫(Stephen Greenblatt)과 같은 학자(참조, <1417년, 근대의 탄생: 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 이야기>, 까치출판사)가 대표적이다. 도대체, 세계의 근대화와 비스듬함이 어떤 관계에 놓여 있기에 이런 강성 발언을 하는 것일까? 물론 이 발언이 성립하는지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다음의 해명이면 충분할 듯싶다. 원자는 자체의 무게로 인해 움직인다고 한다. 그 움직임이 비스듬함이다. 그런데 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자연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특정의 목적, 의미, 가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소위 ‘색안경’을 끼지 않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색안경을 벗고 자연을 자연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학문이 근대의 자연과학인데, 특정의 가치 내지 이념이라는 색안경을 벗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는 인식이 루크레티우스의 “비스듬함” 개념에 뿌리를 두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색안경을 벗고 사물의 세계를 들여다보니, 원자들이 그냥 비스듬하게 움직이고, 그것이 사물의 본성이라는 소리다. 따라서 비스듬함이란 생각은 뭔가 심오한 비결도 마법의 주문도 아닌 셈이다. 그저 자연의 움직임에 대한 단순한 이름이 비스듬함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비스듬함”과 같은 단순한 생각 하나로 세계가 근대화될 수 있었을까?

물론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정도의 해명이 가능할 것이다. 비스듬함이 세계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면, 그 비밀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 답은 비스듬함 개념 자체 안에 숨어 있다. 비스듬함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고, 그 어떤 가치도 부여하지 말자는 데에서 찾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인식을 바탕으로 성립한 것이 소위 근대 과학이 규명하려는 객관의 세계이다. 이런 객관 법칙의 세계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일체의 선입견과 편견 아니 인간적인 감정과 논리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감정을 벗어나는 것을 가장 방해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이를 악용하고 조장하는 것이 종교이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종교이기 때문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일갈이다.

“인간의 삶이 무거운 종교에 눌려 모두의 눈앞에서 땅에 비천하게 누워있을 때, 그 종교는 하늘의 영역으로부터 머리를 보이며 소름 끼치는 모습으로 인간들의 위에 서 있었는데, (중략) 그리하여 입장이 바뀌어 종교는 발 앞에 던져진 채 짓밟히고, 승리는 우리를 하늘과 대등하게 하도다.”(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제1권 62~79행)

오만함(hybris)이 하늘을 찌른다. 신(神)을 맨 앞자리에 놓는 서양 고대인들에게는 특히나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선언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에 자연을 자연 그대로 관찰하고 싶어 했던, 하지만 교회의 힘에 눌려 있었던 자연과학자들에게는 구원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아무튼, 루크레티우스의 저 ‘승리’ 선언은 참으로 대담했는데, 어쩌면,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보다 더 대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대담함 덕분에 루크레티우스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책이 출판된 당대에도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사실 ‘내전(bellum civile)’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기에 시민들은 이 책에 별 관심도 없었다. 한데 정국이 안정되자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읽는 사람이 생겨난다. 대표적인 인물이 오비디우스(Ovidius, 기원전 43~서기 17년)다. 그의 노래다.

“바다도 대지도 만물을 덮고 있는 하늘이 생겨나기 전, 자연은 전체가 한 덩어리였고 한 모습이었다네. 이를 사람들은 카오스라 불렀지. 원래 그대로 투박하고 어떤 질서도 어떤 체계도 갖추지 못한 채 무거운 덩어리로, 마찬가지로 이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으르렁대는 만물의 씨앗(원자)들이 한데 뒤엉켜 있다네.”(제1권 5~9행)

인용은 오비디우스가 루크레티우스의 유물론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단적으로 인용의 모든 것이 뒤섞여 있는 ‘혼돈’을 뜻하는 카오스, 곧 태초의 우주가 무질서하고 체계가 잡히지 않은 물질 덩어리라는 생각이 그 증거다. 이런 종류의 우주관은 무(nihil)로부터 세계를 창조한 유일신을 찬양하는 기독교의 우주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런 이유에서 서양 세계가 기독교화되면 될수록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대한 혐오는 커져 갔다. 당연히 그 중심에는 기독교의 교부들이 서 있었다. 자연과학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예수회조차도 루크레티우스에 대해서는 혐오의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17세기에 이탈리아의 피사 대학에서 활동한 예수회 소속의 젊은 수도사들이 아침마다 올렸다는 기도문이다.

“원자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네. 세상을 이루는 모든 물체는 그 형태의 아름다움 속에서 빛나니, 이런 물체들 없이는 세상은 단지 거대한 혼란일 뿐이라. 태초에 신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고 만드신 것이 또 뭔가를 낳으니, 아무것으로부터도 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아님을 유념하라. 오, 데모크리토스여, 당신은 원자로부터 시작해서는 어떤 다른 것도 만들지 못하노라. 원자는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고 따라서 원자는 아무것도 아니어라.”(<1417년, 근대의 탄생>, 쪽수 313~314)

아침마다 암송했다고 한다. 그런데 성직자들이 루크레티우스의 책을 혐오한 이유는, 그것이 담고 있는 센 발언 탓만은 아니었다. 루크레티우스의 생각에 동의한 볼테르나 홉스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벌인 반(反)종교 운동도 한 몫 거들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성과 합리성을 모든 행위의 원리이자 기준으로 삼는 서양의 근대는 이렇게 시작했다.

■ 맹목에서 벗어나는 길 - ‘나’의 발견

도대체 루크레티우스는 무슨 생각에서 이런 문제작을 지었을까? 참고로 그는 번잡하고 심지어 생명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정치 활동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고 “숨어 사는(lathe biosas)” 은둔의 삶을 즐기면서 학문에 몰두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생활 덕분에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 탓에 욕도 먹어야 했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그의 반박은 이렇게 재구성될 것이다.

모든 운동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 새로운 운동이 고정된 순서에 따라 이전 운동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대개 소위 기계론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이런 입장을 취한다. 이것이 소위 운명-결정론이다. 이에 반해 인과의 사슬로 짜인 운명의 고리를 깰 수 있으며 무한한 이전의 원인으로부터 비스듬함이 가능하다는 것이 루크레티우스의 생각이다. 그는 이 비스듬함을 이끄는 원리가 즐거움의 힘이라 주장한다. 물론 사물에서 원자의 무게들도 인간 의식에서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비스듬하게 움직이며, 그것을 따르는 것이 사물의 본성이며, 이를 임의적으로 제한하고 구속하는 것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인데, 이는 즐거움이라는 최고 목적에 반하는 것이다.

사물의 본성에 따라서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것! 즐거움이라는 최고 목적 때문에 인간은 정해진 노선으로부터 비스듬하게 설 수 있으며, 여기에서 자유의지가 생겨난다고 한다. 즐거움을 최고 목적으로 보았을 때에 이를 방해하는 일체의 인위적인 제도는 요컨대 종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약하는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론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생각이 반드시 옳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얼마든지 다른 생각과 반박이 가능할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런 자유의지를 가지는 존재인 근대 ‘개인’이 이렇게 탄생했다는 것이다. 정신의 감옥인 맹목에서 벗어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우리에서 ‘나’가 탄생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도 그럴 것이, 그 ‘나’들이 모여 깨어난 ‘우리’가 되는 과정은 더욱 어려운 일이기에. 사회의 성숙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비스듬히 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소리다. 이런 의미에서 “비스듬히 서서도 지치지 않고서 버텨냄”을 즐거움으로 삼자는 김월회의 제안은 절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하겠다. 참고 버팀을 강조하는 스토아 철학과 즐거움을 제일주의로 삼는 에피쿠로스 철학이 교묘하게 얽혀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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