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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를 죽인 건 ‘시대의 야만’

변정수 미디어평론가

마광수 선생을 보내며

7일 서울 용산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된 마광수 교수 발인 영정 모습. 연합뉴스

7일 서울 용산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된 마광수 교수 발인 영정 모습. 연합뉴스

때는 바야흐로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를 다시 썼다’는 요란한 상찬 속에 서태지가 돌출하고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이 낙양의 지가를 올리던 시절이었다.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진 오랜 군부독재로 억압되던 ‘지적 모색’과 ‘문화적 실험’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 1990년대 초중반의 한국판 ‘문예부흥기’의 도래를 선포하는 신호탄으로 지금까지도 선명히 기억되는 상징적인 사건들이다. 그리고 <즐거운 사라>가 그때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한국 사회는 그 소설을 ‘문화적 풍요’의 한 계기가 아니라 그 시대적 징후와 완전히 상반되는 ‘야만’의 기억으로밖에는 호출할 수 없다. 이 어처구니없는 ‘공권력 시위’로 말미암아 학문적으로는 촉망받는 연구자이자 예술적으로는 실험정신에 충만했던 작가의 내면은 돌이킬 수 없는 중상을 입게 된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1992년 이전의 마광수라면 몰라도 그 이후의 마광수를 온전히 ‘연구 성과’와 ‘작품의 질’로만 평가하려는 시도는 만용이기 쉽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야만에 만신창이가 된 내면에서 치밀한 논구나 완성도 높은 예술이 태어날 수 있다면 그게 차라리 신기한 일일 터이다. 물론 그가 좀 더 강한 사람이었다면 ‘역경 속에서 꽃핀’ 역사 속의 수많은 천재들처럼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법폭력의 피해자에게 ‘강한 사람’이기까지를 요구하는 건 얼마나 잔혹한 일인가. 적어도 그 야만의 상처를 함께 치유해 나가려는 어떤 사회적 모색도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오로지 ‘야한 교수’로 낙인찍힌 그의 이미지만을 선정적으로 소비하려 했던 우리 모두에겐 그럴 권리가 없다.

그렇다고 피해자라는 이유만으로 한창때의 ‘패기’와 ‘잠재적 역량’을 더는 발전시키지 못하고 ‘고착’돼 버린 일종의 ‘치기’까지도 냉정한 평가에서 면제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피폐한 내면을 날 것 그대로 노출한 그 모든 ‘약점’들은 한국 사회가 그에게 저질렀던 야만을 고스란히 증거한다는 점에서 가장 큰 문화사적 가치를 지닐 수도 있다. 그래서 그의 타계 이후 말년의 고독을 안타까워하며 <즐거운 사라>만을 결정적 계기로 언급하는 건 적잖이 무성의해 보인다. 실은 그보다 더 결정적인 계기는 2000년 재임용 탈락을 전후해 노골화된 일터에서의 인격적 모멸이었기 때문이다.

‘사라’를 죽인 건 ‘시대의 야만’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만일 학문공동체나 문인네트워크의 충분한 지지를 받으며 사회적 연대에 기반을 둔 치유의 시간이 그에게 허락되었다면 속되게 말해 ‘탄압받은’ 이력이 차라리 ‘훈장’이었을망정 내면까지 잠식하는 덫이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고, 그는 ‘지성의 전당’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모멸을 홀로 견뎌내야 했다. 그리고 막연한 ‘우울’에 무너진 게 아니라 ‘울화’를 끝내 이기지 못했을 뿐이다.

달리 말해 그가 증거하는 한국 사회의 야만은 단지 시대착오적인 권위주의만이 아니다. 정작 치명상을 입힌 건,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할 모순에 치여 부상당한 동료에게 쓸모를 스스로 입증하라고 야멸차게 내몰며 고장난 부품 갈아치우듯 팽개치면서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맹목적인 실적주의(와 그 배면에 똬리를 튼 음험한 패권주의)일 터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마광수라는 이름으로 이 야만을 또렷이 기억할 것이다. 비로소 자유로워진 그의 영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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