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운
고정운 감독이 스포츠서울과의 인터뷰를 마친 뒤 기념촬영에서 활짝 웃고 있다. 이용수기자

‘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이용수기자]선수 시절 그라운드 위를 야생마처럼 뛰어다닌다 하여 붙은 별명 ‘적토마’. 상대 선수를 하나, 둘 튕겨내며 돌파하는 단단한 몸의 고정운 전 FC 안양 감독의 현역 시절 모습은 축구 팬들에게 시원한 기억으로 남는다.

지난해 FC안양의 사령탑을 내려놓은 고정운 감독은 현재 지도자로서 경력을 이어가기 위해 잠시 숨 고르기를 하고 있다. 마치 현역 시절 ‘적토마’처럼 앞을 돌파하기 전 발동을 걸고 있다. 그는 최근 강원도 태백에서 열리고 있는 제55회 전국추계대학축구연맹전을 다녀오기도 했다. 대학 축구의 흐름과 원석들을 찾아내는 등 프로 지도자로서 두 번째 걸음을 내딛기 위한 준비단계였다.

스포츠서울은 선수 시절 누구보다 뜨거웠던 고 감독의 추억여행에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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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 시절 그라운드를 뛰어다니던 고정운 (스포츠서울DB)

◇‘적토마’ 고정운의 탄생 “노력 없이 이뤄지는 건 없어”

고정운 감독은 대학 진학 때만 해도 평범한 선수였다. 그 역시 스스로 대학 무대에 섰을 때부터 부족함을 느꼈을 정도다. 고 감독은 “대학 1학년 때 첫 경기부터 체력적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느꼈다. 몸싸움도 힘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그 당시 한국 축구는 투박해도 파워풀한 선수가 프로나 대표팀에 많이 등용되고 스타플레이어로 성장했다. 이 때문에 고 감독 역시 피지컬 성장에 목표를 두고 운동했다. 고 감독은 “피지컬적으로 좋아지기 위해 튜브, 줄넘기, 웨이트 트레이닝 등 개인 운동을 정말 많이 했다”며 “종아리에서 핏줄이 터져도 운동할 정도로 정말 무식하게 했다. 대표팀을 목표했기에 운동을 멈출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친구들과 외출해서도 운동시간만 되면 복귀해 몰래 운동하고 다시 놀러 나간 고 감독은 1학년 때 63kg이었던 체격을 졸업 무렵 78kg까지 늘렸다. 오롯이 근육량으로 늘린 것이었다. 고 감독은 “힘이 붙으니까 몸싸움하면 전부 나가떨어졌다. 대학 때 프로와 경기해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스피드, 슛, 패스, 제공권 등 한 부문에 특출난 선수가 도드라지고 주목받았던 시대에 고 감독은 단단한 체격으로 측면을 돌파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피지컬이 좋아지니까 스피드가 자동적으로 붙더라. 드리블 돌파할 때 누가 와도 퉁퉁 치고 갈 수 있는 체력이 되니까 공격수로서 희열을 느꼈다”며 “그 당시 친구들에게 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승부 근성도 좋았기에 개인 운동을 하면서 내 특징을 만들었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적토마’라는 내 캐릭터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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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미국 월드컵 조별리그 C조 2차전 볼리비아와의 경기에서 고정운(오른쪽 두번째)이 헤딩슛을 날리고 있다. (스포츠서울DB)

◇단 한 번뿐인 소중한 기억 ‘94 미국 월드컵’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94년 미국 월드컵, 98년 프랑스 월드컵 등 총 세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고정운 감독이 월드컵 무대를 밟은 건 한 번이다. 세 차례 모두 월드컵 예선에서 활약했으나 꿈의 무대를 밟을 수 있던 건 94년뿐이었다. 그렇기에 고 감독에게 미국 월드컵은 소중한 기억이다. 그는 “‘적토마’ 고정운이 열심히 뛰고 성실하다는 것을 각인시켜 준 게 94년 미국 월드컵이다. 당시 서정원, 황선홍, 홍명도 등 모두 잘했지만 내가 팬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준 게 더운 데서 열심히 뛰어다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소중한 기억인 만큼 월드컵 첫 경기를 치른 94년 6월 17일의 스페인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고 감독은 “월드컵은 내게 꿈의 무대였다. 지금처럼 미디어를 통해 많은 정보를 얻어 실감한 건 아니지만 첫 경기에서 애국가가 울릴 때만큼은 달랐다. 그전까지 많은 A매치를 뛰었지만 다리가 그렇게 후들후들 떨린 건 처음이었다. 그만큼 태극마크의 무게를 느꼈다”며 “지금은 경기 끝나면 팬들이 댓글로 반응하지만 그 당시에는 전보였다. 작은 엽서가 호텔로 몇백 장씩 전송됐다. 잘하면 칭찬, 못하면 질타가 있었다”고 떠올렸다.

고 감독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뛴 월드컵 무대의 성적은 2무 1패였다. 하지만 당시 태극전사들이 상대한 팀과 한국의 경기력을 본다면 평가는 달라진다. 당시 스페인~볼리비아~독일 등과 조별예선을 치른 한국은 놀라운 경기력을 보여줬다. 첫 경기 스페인전을 2-2로 비기고 볼리비와의 2차전 역시 실점 없이 무승부를 기록했다. 독일과의 3차전에서 2-3으로 패하긴 했으나 시간만 더 있었으면 경기를 뒤집을 수 있었다. 전반전에만 3골을 실점한 한국은 후반 황선홍과 홍명보가 추격골을 넣었다. 고 감독은 “당시 경기력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독일전에 5분만 더 주어졌어도 경기를 뒤집을 수 있었다”고 자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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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버쿠젠 갔더라면 내 축구 인생이 달라졌을 것”

고정운 감독은 지난 89년 창단된 일화에 입단해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일화에서 뛴 8년간 총 세 차례의 K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팀 주축으로 93년 K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렸던 고정운은 미국 월드컵 이후 주가를 올렸다. 이때 80년대 독일 분데스리가를 휘저었던 차범근 감독의 추천으로 레버쿠젠의 영입 제안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고 감독은 놓아주질 않는 구단 때문에 유럽 진출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고 감독은 “우승 더 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보내주지 않았던 것”이라며 “그때는 계약이 노비문서나 다름없었다. 그 당시 박규남 단장이 날 안 보내줬다. 레버쿠젠으로 보내줬다면 내 인생은 또 달라졌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현했다.

아쉬운 순간은 고 감독 축구 인생에 평생 기억되고 있다. 그는 “시즌 끝난 휴가 때 독일에 가서 레버쿠젠 칼문트 단장과 협상 테이블에도 앉았다. 아직도 기억한다. 잊지 못한다. 이적료 5억, 연봉 3억이었다. 그런데 일화에서는 안 받는다고만 했다”며 “당시에는 이적시켜주지 않으려는 의지가 확고하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고 감독이 해외 진출한 건 우승을 한차례 더하고도 2년 뒤인 97년에야 일본 J리그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축구를 배우기 위한 길이 아닌 단순히 금전적인 만족에 택한 길이었다. 고 감독이 K리그에서 J리그로 이적한 첫 사례를 만들면서 그의 후배들도 속속 J리그에 진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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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당시 K리그 올스타전에서 마련한 은퇴식에서 고정운(왼쪽)이 포항 서포터스로부터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하는 의미의 큰 절을 받고 있다. (스포츠서울DB)

◇태극마크의 무게를 회복하려면 은퇴 선수를 챙겨야 한다

많은 지도자와 선수들이 태극마크의 무게가 전과 같지 않다고 한다. 그만큼 태극전사들의 투지와 열정이 전보다 못하다는 소리다. 하지만 고정운 감독은 태극마크의 무게를 예전으로 다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그건 바로 한국 축구에 기여한 레전드급 선수들에 대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고 감독은 “내가 2001년 8월 13일 K리그 올스타전에 은퇴 경기를 했다. 지금껏 은퇴경기를 나처럼 화려하게 한 사람이 없다. 당시 올스타전 겸 수원월드컵경기장 개장 경기를 한 것인데 K리그에서 정말 화려하게 마무리해줬다. 당시 김원동 사무국장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면서 “축구협회에서 왜 그렇게 해주지 않는가가 불만이다. ‘태극마크 달고 열심히 뛰면 마무리할 때 은퇴경기를 화려하게 해주는구나’라고 후배들이 생각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축구협회는 지난 2002년부터 A매치 70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가 은퇴하면 은퇴식을 마련해주고 있다. 고 감독은 “하프타임에 잠깐 축구협회 회장이 트로피 하나 전달해주는 건 아니라고 본다. 국가관이라는 건 그런 부분에서 나오는 것”이라며 “내가 2001년 선수 은퇴 뒤 독일로 유학 갔다. 당시 2002 한일월드컵 유럽지역 예선을 치르고 있었는데 독일 뮌헨의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잉글랜드가 독일을 5-1로 이겼다. 이때 잉글랜드가 이래서 추앙받는구나를 느꼈다. 경기장 전광판에 잉글랜드 레전드가 등장하는 모습이 포착되니 관중 모두가 기립박수를 쳤다. 우리나라도 A매치가 있으면 정·재계 인사를 초대할 것이 아니라 레전드급 선수들을 초대해 대우받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끝나지 않은 도전, 프로 지도자의 꿈

축구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고정운 감독은 2003년 선문대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전남과 FC서울 등을 거쳐 풍생고 감독을 맡았던 고 감독은 2017년 11월이 돼서야 프로팀 지휘봉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재정이 넉넉하지 못하고 정쟁의 도구로 자주 쓰이는 시민구단이었던 FC안양에서 1년이라는 짧은 시간만 함께할 수 있었다. 고 감독은 “선수 때에 비해 지도자 생활은 운이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처음부터 꼬였다. 선문대에서 더 오래 있다가 프로에 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성급했다는 생각도 있다. 모든 게 내 판단 실수다. 안양에서 감독을 맡으면서 3무8패할 때는 정말 힘들었다. 잘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내 축구를 밀고 나갔던 게 성과가 나니깐 재밌더라. 그런데 팀 내부 사정으로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1년간 큰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런 경험이 있기에 이제 어떤 팀을 맡더라도 잘 헤쳐나갈 수 있는 자신감이 됐다”고 밝혔다.

고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던 FC안양의 2018시즌 성적은 6위(12승8무16패)였다. 팀을 처음 맡고 11경기 무승(3무8패)을 기록한 뒤로 12승5무를 챙겼다. 선수들이 달라질 수 있던 건 고 감독이 선수 시절 박종환 감독에게 배웠던 것처럼 엄하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는 “눈이 돌아가도록 집중해서 가르쳤다. 당시 안양에 오는 선수들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와야된다’하고 끌어모았다. 여기서 혹독하게 살아남고 다른 팀을 간다면 언제든지 보내준다고 약속했다. 선수들에게 동기부여를 주기 위해 혹독하게 프로의식을 갖도록 엄하게 가르쳤다. 특징 있는 선수를 만들기 위해서 채찍질을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태백에서 머물며 대학 축구를 지켜보고 온 고 감독은 다음 발걸음을 떼려 한다. 그는 “아직 지도자로서 역량은 다 보여주지 못했다. 20%도 한국 축구에 이바지 못한 것 같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도자를 더 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purin@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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