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위해 연쇄살인…이상한 감독 박찬욱, 10년간 영화화 ‘눈독’

백승찬 기자

액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최필원 옮김 |오픈하우스 | 340쪽 | 1만3000원

[이상한 책을 보았다]취업 위해 연쇄살인…이상한 감독 박찬욱, 10년간 영화화 ‘눈독’

박찬욱은 이상한 감독이다. 근친상간(올드보이), 뱀파이어가 된 신부(박쥐), 사랑에 빠진 일본 귀족 여성과 조선인 하녀(아가씨)처럼 이상한 이야기만 한다. <액스>(원제 The Ax)는 그런 이상한 감독이 10년 가까이 영화화하려고 노린 소설이니 ‘이상한 책’임이 틀림없다.

‘액스’는 ‘도끼’란 뜻이지만, ‘해고하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한국어 ‘자르다’의 용례와 비슷하다. 23년간 제지회사에서 일해온 버크 데보레라는 50대 남성이 주인공이다. 직장에선 성실한 중간관리자이며, 십수 년 전 잠시 외도의 유혹에 빠진 것을 제외하면 괜찮은 가장이기도 하다. 평범하디 평범한 중년 남성 버크에게 ‘정리해고’라는 이름의 날벼락이 떨어진다. 버크가 무슨 잘못을 해서가 아니다. 산업의 조정기를 맞아 제지업계 전체가 몸집을 축소했고, 직원들은 쓸모를 잃은 기계처럼 잘려나갔다. 회사는 퇴직자들을 후하게 대접했다. 퇴직금을 잘 정산했고, 의료보험도 얼마간 유지해줬다. 직업 재교육도 실시했다.

그러나 해고는 해고다. 23년간 제지업계에서 일한 사람에게 2개월가량의 ‘에어컨 수리’ 교육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미 에어컨을 수리해온 전문가들이 수두룩할 텐데. 버크는 차분하게 동종업계로 재취업을 준비하지만, 거리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실직자들이 널렸다. 버크는 초조해지고, 그를 둘러싼 가정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궁지에 몰린 버크는 이상한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경쟁자가 없다면 취업도 쉽지 않을까. 경쟁자를 죽이면 어떨까. 버크는 가짜 제지회사의 구인광고를 낸 뒤, 가짜 사서함에 구직자 이력서를 받는다. 그리고 자기보다 스펙이 뛰어난 6명의 남자를 골라낸다. 이제 평범한 가장이었던 버크는 연쇄살인자가 된다.

<액스>는 연쇄살인을 다룬 미스터리 소설이지만, 동시에 블랙코미디이기도 하다. 아무리 절박하다 한들, 평범한 50대 남자가 사람을 그리 쉽게 죽일 수는 없다. 하지만 버크는 우연과 행운의 도움으로 경쟁자들을 하나둘씩 제거해나간다.

버크는 살인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기분 좋은 권력’을 누린다. 애타는 구직자들의 이력서를 읽는 기쁨이다. 40~50대의 구직자들은 저마다 강점을 내세우며 일자리를 구한다. 화목한 가정의 가장임을 내세우기도 하고, 일자리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이주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수십 년 전의 우수한 군복무 경력을 적어두기도 한다. 형식은 제각각이지만, 이 모든 이력서들은 절박한 표정으로 일자리를 달라고 사정한다. 아마 오늘날의 많은 면접관들도 구직하는 청년들의 이력서를 보면서 같은 권력을 누릴 것이다. 누군가는 그 권력을 타고난 것처럼 으스대고, 누군가는 모두에게 일자리를 주지 못하는 미안함을 느낄 것이다.

그나저나 박찬욱판 <액스>는 언제 볼 수 있을까. 현재로선 난망하다. 박찬욱은 MBC 라디오 프로그램 <푸른밤 이동진입니다>에 출연해 “<도끼>가 마지막 단계에서 투자가 무산됐다”며 “우울하다”고 말했다. 취업을 위해 살인자가 되는 남자 이야기에 거액을 댈 투자자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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