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구] 通信使를 통해 韓日 관계의 답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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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구] 通信使를 통해 韓日 관계의 답을 찾는다

    

⊙ “일본과 이웃함으로써 피해가 막심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일본을 이기려는 경쟁심이 생겨 우리가 더 분발하게 돼”

⊙ “조선통신사라고 하면 일본이 우위에 있던 後期 통신사 연상… ‘통신사’ 또는 ‘조선시대통신사’로 바로잡아야”

⊙ 조선시대통신사현창회, 신숙주·황윤길 등 통신사 후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단체

⊙ 조선 최고의 통신사(외교관) 李藝같이 인간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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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그린 조선통신사 행렬도. 에도 시대 일본인들에게는 큰 구경거리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끄는 신정부가 탄생했고, 일본에서는 아베신조(安倍晉三) 전 총리가 불의의 사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 경색됐던 한일(韓日) 관계가 어떠한 형태로든지 변화될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일본 지인(知人)들도 “향후 한일 관계는 정상화될 것으로 믿으며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다”면서 “일본의 정치도 크게 바뀔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어디에서 한일 관계의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불현듯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가 떠올랐다.

수소문 끝에 ‘조선시대통신사현창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명훈(李明勳·71) 고려대 명예교수와 통화 후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7월 22일의 일이다. 주변 좌석에서 일본인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코로나19로 묶였던 여행길이 서서히 풀리고 있음을 실감했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기도 전에 이명훈 교수가 말문을 열었다.

왜곡된 조선통신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통신사에 대한 인식을 달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본식의 통신사 인식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대단히 잘못됐습니다. 일본은 시대 구분을 중세(中世)와 근대(近代)로 나누고 있지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중세 무로마치(室町) 막부보다는 근대의 에도(江戶) 막부, 즉 도쿠가와(德川家康) 막부의 통신사로만 생각합니다. 임진왜란 후의 조선 후기(後期) 통신사로 한정해 선을 그어버린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의 시대 구분으로는 조선 전기(前期)와 후기를 통틀어 하나의 조선 시대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일본식의 조선통신사 개념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두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 어떤 문제점인가요.

“첫째, 통신사는 외교관임에도 불구하고 외교 현안, 즉 콘텐츠(contents)는 없고 외교 의전(儀典)인 프로토콜(protocol)만 남은 외교관이 됩니다. 이는 실제 통신사의 역사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이것은 역사의 왜곡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피로인(被擄人), 즉 일본에 잡혀간 사람들의 송환 교섭, 왜구(倭寇) 대책과 조업권(操業權) 협상 등 외교 현안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후기에 와서는 에도 막부가 안정됨에 따라 축하와 조문(弔問) 등 외교 의전에 치중하게 되거든요.

둘째, 우리가 일본보다 강했던 조선 전기의 외교는 지워지고, 임란 이후 조선 후기의 역사만 부각되는 부작용이 생깁니다. 일본이 임란 준비 등으로 강하게 무장한 이후, 후기에는 대체로 일본이 조선보다 경제적·정치적으로 우위에 있었습니다. 전기에는 조선이 일본과 대등하거나 더 강했는데, 이 시대 통신사의 역사는 버리고 일본이 더 강성했던 시대의 통신사만 내세웠다는 것입니다. 통신사 역사를 통해 일본은 자신들이 강했던 시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피해자로서, 피(被)침략국으로서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떼어내지 못하고 있어요. 이러다 보니 일본의 민간과 학계 일부에서는 (조선 후기) 통신사가 일본 조정에 조공하기 위해 내일(來日)한 것이라는 인식이 상당히 넓게 퍼져 있습니다.”

조선 시대 통신사의 후예들이 만든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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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훈: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美위스콘신대학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美연방준비은행(FRB) 이코노미스트, 세계은행(IBRD) 컨설턴트, 한국은행 조사부 전문연구위원을 지냈다. 美메릴랜드대학 아시아분교 겸임교수, 고려대 경상대학 교수, 고려대 경상대학장 및 행정대학원장을 거쳐 현재 고려대 명예교수로 활동하면서 ‘조선시대통신사현창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이명훈 교수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통신사는 조선 전기에 시작하여 조선 후기에 끝났는데, 그 역사를 반(半)으로 잘라서 보는 것은 양국(兩國) 모두에 해를 끼칩니다. 두 나라가 좋은 관계를 가지려면 일본은 가해자의 콤플렉스에서, 한국은 피해자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진정한 한일우호 관계가 생성될 수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었던 조선 전기의 통신사 역사를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 ‘조선시대통신사현창회’는 어떤 단체입니까.

“조선 시대에 일본에 파견되었던 통신사들의 업적을 널리 알리자는 취지에서 그 후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단체입니다. 2007년에 설립되었고, 2019년에 사단법인으로 등록했으며 회원은 600명 남짓입니다. 종로3가에 사무실이 있고, 1590년에 파견된 황윤길(黃允吉)의 후손이며 황희(黃喜·1363~1452년) 정승의 후손이기도 한 황재하씨가 회장입니다. 1443년에 파견된 신숙주(申叔舟)의 후손인 신경식씨가 사무국장이고요. 저는 4년 전부터 부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1422년, 1424년, 1428년, 1432년 일본에 파견된 이예(李藝)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통신사란 조선 국왕이 일본 국왕에게 파견한 공식 외교사절의 통칭입니다. 여기서 일본 국왕은 당시 유명무실했던 ‘천황’이 아니라, 1403년 명(明)나라가 일본 국왕으로 책봉한 막부(幕府) 쇼군(將軍)을 가리킵니다. 통신사의 파견은 1404년에 시작하여 1811년까지 조선 전기 12회, 후기 12회 이렇게 이뤄졌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후손들이 이렇게 모일 수 있다는 것은 일본인의 눈에는 상당히 놀라운 일일 것입니다.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에는 족보(族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겠지요.”

‘조선통신사’는 잘못된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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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행렬 중 임금의 국서를 모신 가마가 지나가는 모습.>

— 왜 ‘조선통신사’가 아닌 ‘조선시대통신사’인가요.

“이것이 역사적으로 정확한 명칭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조선통신사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그대로 따라서 부르다 보니 우리나라에서도 ‘조선통신사’로 굳어져 버렸습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조선에서 온 통신사이기 때문에 조선통신사가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조선통신사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통신사’ 혹은 ‘일본통신사’로 쓰여 있습니다. 우리가 일본에 대사(大使)를 파견하면 일본대사지 한국대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간 워낙 ‘조선통신사’가 귀에 익어버렸기 때문에, 이제 와서 ‘일본통신사’라 부르면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현창회에서는 ‘조선시대통신사’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2017년에 조선통신사가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바 있습니다. 참 반가운 일이었는데,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때 ‘통신사’ 혹은 ‘조선시대통신사’가 아닌 ‘조선통신사’란 명칭으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의 관점이 적용된 명칭이지요. ‘조선’을 빼고 그냥 ‘통신사’라 부르면 좋을 것 같아요. 조선의 관점도 일본의 관점도 아닌 중립적인 명칭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그렇게 쓰여 있고요. 유네스코에 어필해 ‘통신사’로 명칭을 바꾸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이명훈 교수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는 333점의 통신사 기록물이 등재돼 있습니다. 우리의 기록물은 124점이고 일본의 기록물은 우리보다 많은 209점인데, 우리 통신사 일행이 남겨놓고 온 서화 등 작품이 일본에 많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통신사는 일본에만 파견”

— 그냥 ‘통신사’라고만 하면 다른 나라 통신사와 혼동이 되지 않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통신사란 명칭은 일본에 보낸 외교사절에만 사용되었습니다. 일본과 조선은 교린(交隣) 관계였는데, 교린이란 이웃 나라와 사귐이라는 뜻이지요. 명나라는 제국의 위치였기 때문에 교린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동짓날을 전후해서 보내는 사신을 ‘동지사(冬至使)’, 황태자 생일 축하사절은 ‘천추사(千秋使)’ 등으로 통신사와 구별하여 불렀습니다.”

— 그럼 일본 외의 다른 나라에는 통신사를 안 보냈나요.

“당시 조선의 교린 관계는 일본과 유구국(琉球國·지금의 오키나와)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유구국에는 공식적으로 통신사라는 명칭의 사신을 보낸 적이 없습니다. 공식적으로 통신사를 보낸 곳은 일본이 유일하기 때문에 혼동은 있을 수 없습니다.”

— 통신사에 대한 연구회나 모임이 또 있나요.

“우선, 부산에 있는 부산문화재단과 한일관계사학회를 들 수 있겠습니다. 부산문화재단은 부산에서 열리는 통신사 관련 행사를 주도해왔으며, 이 행사들을 위해 일본에 있는 ‘조선통신사 연지연락협의회’와 협조 관계를 구축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지(緣地)란 ‘인연이 있는 땅’이란 뜻이며, 일본에 닿은 통신사가 지나가던 길목에 있던 고장을 뜻하지요. 연지협의회는 ‘전쟁 시대가 가고 평화 시대가 왔다’는 에도 막부의 통신사 개념에 국한해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합니다.”

— 한일관계사학회는 어떻습니까.

“한일관계사학회는 1992년 이래 한일 관계의 역사를 학술적으로 연구해온 학회입니다. 매월 학술발표회를 개최하며, 매년 네 차례씩 《한일관계사 연구》라는 제목의 전문학술지를 출판하는 등 대단히 활동적인 학회지요. 250여 명에 달하는 한일 양국의 연구자들이 서로 협력하며 한일 관계사를 연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통신사에 대한 학술적 자료도 많이 쌓였습니다.”

“후기에는 현안 없어 외교 실종”

— 그 두 단체에서는 통신사 명칭이나 시대 구분에 대해 어떤 반응입니까.

“부산문화재단의 경우, 에도 시대 통신사 교류에 중점을 두어서인지 ‘조선통신사’라는 명칭과 에도 막부(조선 후기)라는 시대 구분에 집착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명훈 교수는 “한일관계사학회가 2016년 부산문화재단에 공문을 보내 통신사 명칭 및 시대 구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바 있다”고 말했다.

“첫째, ‘조선통신사란 일본에서 보면 쉽고 당연한 개념이지만 한국의 입장에서는 부적절하고 어색한 표현’이라는 지적이었습니다.

둘째, ‘통신사 관련 기념활동을 조선 후기(일본의 에도 시대) 통신사로 한정하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과도 맞지 않고 자칫하면 조선 전기 통신사의 실체를 무시할 위험이 있으며, 교육적인 견지에서도 우려할 점이 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저도 조선시대통신사 현창회의 부회장 자격으로 부산문화재단이 개최한 각종 회의에 참가해 이 이슈를 부각하기도 했지만, 부산문화재단은 아직까지 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 통신사에 있어서 ‘외교’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조선 후기 통신사의 경우에는 대체로 외교 의전에 치중했습니다. 일본이 전쟁 이후 강국이 되다 보니 통신사의 경비는 모두 일본에서 댔습니다. 일종의 이벤트 성격의 행사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외교 관계는 약했습니다. 외교 문제에 대한 현안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즉 외교의 현안 실종이었죠. 조선 전기의 상황과는 사뭇 달랐던 것입니다.”

— 어떻게 달랐나요.

“조선 전기 통신사에게는 피로인 송환 교섭, 왜구 대책과 조업권 협상 등 외교 현안이 많았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왜구가 준동(蠢動)하여, 그들에게 잡혀간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통신사들이 일본 측과 협상하여 그들을 무사히 고국으로 데려오는 데에 큰 힘을 기울였습니다.

왜구 대책은 외교적 회유책(懷柔策)과 무력 진압으로 크게 나누어집니다. 1419년(세종 1년) 조선은 이종무(李從茂·1360~1425년) 장군을 보내 왜구의 본거지였던 쓰시마(對島)를 정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조선이 강했다 할지라도, 바다에 익숙한 왜구를 군사적으로 제압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의 조업권과 무역권을 내어주면서 일본이 스스로 왜구의 해적질을 금하게 하는 외교적 회유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한일 양국은 價値를 共有하는 관계”

— 통신사에 대해 연구하다 보면 한국과 일본은 어떤 관계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나요.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양국(兩國)은 가치(價値)를 공유(共有)하는 관계니까요. 중국도 지정학적·경제적 측면에서 중요하지만, 특히 한일 양국은 서로 등을 돌릴 수 없는 관계입니다. 우리는 일본을 활용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우리가 상대적으로 큰 나라인 일본과 이웃함으로써 피해가 막심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또한 일본을 이기려는 경쟁심이 생겨서 우리가 더 분발하게 됐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일본 역시 지리적으로 세계 어느 나라보다 인접해 있는 이웃 한국과 친구가 되지 못한다면, 그들의 세계전략에서나 경제성장에서나 위험요소이며 불안요소일 것입니다.”

— 그렇지요.

“양국의 관계는 불편하다는 이유로 보자기 같은 것으로 덮어서 대충 가리고 넘어갈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면 일단 끄집어 내놓고, 꼬인 매듭을 어렵더라도 풀어나가야 하는 관계입니다. 이병주 선생의 소설 《산하》에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神話)가 된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한일 관계도 햇빛에 바래서 역사가 되어야 합니다.”

—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를 위해서는 양국 정부가 서로 진정성을 가지고 대면(對面)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두 정부는 모두 기본적으로 자기 나라 국민의 표를 의식하게 됩니다. 즉 양국 민간의 정서가 상대국을 좋아하고 우호를 원하게 되어야만, 정치인도 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지요. 그래서 민간 우호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삼국 시대 이래 왜구, 임진왜란, 국치(國恥) 시대 등 가해-피해의 DNA가 양국 국민의 혈액에 녹아 있기 때문이지요. 그 역사의 질곡(桎梏)을 깨고 꽉 막혀 있는 물꼬를 터야 합니다. ‘이벤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일본을 가장 많이 왕래한 통신사 이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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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벤트라면?

“조선 시대 통신사가 바로 그 이벤트입니다. 무덤 속에서 통신사의 콘셉트(concept)를 끄집어내서, 이를 통해 양국 민간 우호의 큰 줄기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여기에는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명승지에서 사진을 찍을 때 ‘사람’이 없이 경치만 들어 있는 사진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 안에 ‘사람’이 들어 있어야 마음의 움직임, 다시 말해 감동이 있잖아요. 전기든 후기든 ‘통신사’라는 개념만으로는 안 되고, 심금(心琴)을 울리는 감동, 즉 마음(心)의 거문고(琴)를 켜는 사람(인물)을 찾아내어 활용해야 합니다.”

— 아주 좋은 의견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인물이 있을까요.

“일본에는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문·조선어·중국어에 능통했으며 한일 양국 간 대등한 외교 관계를 펼쳤습니다. 양국 우호에 기여한 인물입니다. 조선의 경우를 든다면 충숙공 이예(忠肅公 李藝·1373~1445년)를 들 수 있습니다.”

— 이예는 어떤 인물입니까.

“조선 전기의 외교관입니다. 일본을 가장 많이 왕래한 통신사지요. 통신사 사행에는 많은 수행원이 따르는데, 보통 통신사라 하면 정사·부사·서장관의 삼사(三使)를 말합니다. 조선을 통틀어 통신사는 모두 24회 파견되었는데, 그 삼사 중 이름이 알려진 이는 61명입니다. 이예가 4회, 윤인보가 3회 파견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각 1회 파견되었지요.

이예는 일본 국왕을 알현한 4회 이외에도 이런저런 일로 유구국, 쓰시마, 규슈 등 일본 각지에 40회 이상 파견된 것으로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적과 풍랑 등으로 목숨을 걸고 갈 때도 많았습니다.”

이예, 어머니는 왜구에 납치돼

<쓰시마 엔쓰지에 있는 충숙공 이예 공적비.>

— 이예의 외교적 업적은 어떤 것입니까.

“이예는 667명의 피로인을 데려오고, 양국 통교의 근간이 된 계해약조(1443년·세종 25년) 체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세종의 명을 받아 《대장경(大藏經)》을 일본 국왕에게 전달하고 일본의 자전(自轉) 물레방아와 무쇠로 만든 대포를 조선에 들여오는 등 조선과 일본의 문화 교류에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의 강인한 정신력과 뜨거운 민족애(民族愛)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큰 귀감이 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약 2000개의 ‘졸기(卒記)’ 가운데 150번째로 길이가 긴 것이 이예의 ‘졸기’입니다. ‘졸기’에는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명훈 교수는 이예의 졸기 내용을 설명했다.

“이예가 8세 되던 해(1380년·고려 우왕 6년)에 어머니가 왜구들에 의해 일본으로 잡혀갔습니다. 28세가 된 1400년, 그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가서 쓰시마와 이키시마(壹岐島)의 집집마다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찾지 못했습니다.

그 4년 전인 1396년, 왜구들이 쳐들어와 울산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종4품 군수마저 잡아갔습니다. 당시 울주군의 하급 관리였던 그는 군수를 모시겠다는 일념으로 뒤에 처진 왜구의 배에 숨어들었습니다.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자 그는 군수가 잡혀 있는 배로 옮겨 타 ‘나도 잡아가 주시오’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는 쓰시마로 잡혀가서도 군수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습니다. 이에 감동한 왜구들은 그들을 살려주었고, 이듬해(1397년) 외교 교섭에 의해 군수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이예는 국왕의 부름을 받고서 외교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왜구들에게 잡혀간 667명의 포로를 조선으로 데려오는 엄청난 일을 해냈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개인의 아픔을 승화시켜 동포의 아픔을 달래는 놀라운 일을 한 것입니다.

그의 아들 이종실(李宗實)도 통신사를 행했는데, 일본에 파견되어 일본 국왕이 있던 교토로 향하는 길에 풍랑을 만나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어머니도 왜구에 의해 잃고, 아들까지 일본으로 향하던 길에 잃은 가슴 먹먹한 사연이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이예가 일본에서 포로를 데려온 대목이다.

< 신사년 겨울에 포로 된 50인을 찾아서… 경인년까지 10년 동안 해마다 통신사가 되어 포로 500여 명을 데려왔다. 병신년에 유구국에 사신으로 가서 또 40여 명을 데려왔고, 임인년 및 갑진년에 찾아온 사람이 70여 명이어서… 계해년에는 포로 7명과 도적질한 왜구 14명을 찾아왔으므로…〉

“명분과 실리를 모두 갖추어야”

— 앞으로의 한일 관계에 대해서 학자의 입장에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본과의 관계가 중요하니까 최대한 빨리 복원해야 한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빨리빨리만 외쳐서는 안 됩니다. 너무 서두르는 인상을 주면 일본을 ‘갑(甲)’의 입장에 세우게 되고, 그래서는 우리 국민의 민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 결과를 얻지도 못하고 민심만 잃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복원은 당연히 바람직하지만, 전략과 환경 조성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조선 전기 조일(朝日) 외교의 추억을 소환할 만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없었던 시대니까요.”

여기서 이명훈 교수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태종의 교린이신(交隣以信)과 세종의 교린이성(交隣以誠)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교린을 신(信)으로써 하며, 또한 성(誠)으로써 한다는 것입니다. 뒤엎으려고 하지 말고 새롭게 시작하는 욕심을 지양하고, 신(信)과 성(誠)을 토대로 하는 외교 철학을 중시해야 합니다. 전(前) 정부 시대에 있었던 것을 무조건 부인하지 말고, 기존의 것을 살리면서 발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외교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성찰은 직업외교관의 경륜에서, 또 한일외교사 학자들의 역사의식에서 찾으면 될 듯싶습니다. 《세종실록》에 기록된, 1440년(세종 22년) 이예가 세종께 아뢴 말도 참고할 만합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첨지중추원사 이예가 아뢰기를, ‘… 국가대의(國家大義)로 타이르며… 그 생업을 유지하게 하오면… 왜인들이 마음속으로 기쁘게 성복(誠服)할 것입니다’ 하니, 예조에 내리었다.〉

이명훈 교수는 “국가대의라는 대의명분으로 타이르고 실리(實利)로 달래야 하며, 대의명분만으로는 모자라고 실리만으로도 모자라니, 둘을 갖춤으로써 왜인들이 성심으로 따르게 된다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역사는 돌고 돈다”

— 조선 시대 통신사에 대해 연구하시면서 ‘외교’의 중요성을 든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일본 교토에 덴류지(天龍寺)라는 절이 있습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하지요. 15세기 중엽에 이 절이 화재로 불탔을 때의 일화가 있습니다.

그때 일본 국왕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가 세조에게 다음과 같은 취지의 국서(國書)를 보냅니다.

‘지난번 화재에도 많이 도와주셨는데, 이번에도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막부의 상징이자 중요한 사찰인데 도와주십시오!’

일본 국왕의 이 국서는 그 내용이 《세조실록》에 실려 있습니다. 풍랑으로 순직한 통신사 이종실(이예의 아들)의 시신을 찾지 못해 덴류지에 명하여 수륙대재회(水陸大齋會)를 지내게 했다는 내용도 이 국서에 들어 있지요.

조선 후기나 요즘이라면, 이렇게 조선의 원조를 요청하는 일본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겠지요. 그때는 조선이 일본보다 대국이었으니까 가능했던 일화이지 않겠습니까? 역사는 돌고 돕니다. 조선 전기와 같이 우리가 일본보다 앞서는 날이 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열등감을 갖지 말고, 일본은 우월감을 버리고, 서로 대등한 위치에서 한일 외교를 복원해야 합니다. 앞에서도 말했습니다만, 바로 이를 위해서 조선 전기 통신사라는 ‘이벤트’가 필요하며, 그 이벤트를 위한 상징, 즉 아이콘으로 통신사 이예를 활용하자는 것입니다.”

서희와 이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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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외교원에 있는 충숙공 이예의 동상.>

— 개인적으로 이예에 대해 많이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된 동기가 있나요.

“이예 같은 인물이라면 위인으로서 우리나라 어린이와 젊은이들의 역할 모델로 삼을 만한 인물이라 생각한 것이 그 동기입니다. 이예가 2010년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선정된 후 외교부 산하 국립외교원 구내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국립외교원은 외교관을 양성하는 기관입니다. 거기에 서희의 동상과 이예의 동상이 있습니다. 서희는 고려 시대 북방 외교, 이예는 조선 시대 남방 외교를 상징하는 인물이지요. 그러나 이예는 서희만큼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아직 중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초등학생들에게 존경하는 위인을 물으면 15명 정도까지는 열거합니다. 그러나 우리 초등학생들에게 물으면 세종대왕, 신사임당, 이순신, 유관순 등을 세다가 맙니다. 우리나라에는 절대적으로 위인이 모자랍니다. 존경의 대상인 위인을 많이 가진 사회는 문화적으로 풍부한 사회가 됩니다.”

역사 속에는 항상 교훈이 있다. 그래서 역사는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자 미래인 것일까. ‘계고(稽古)’, 즉 ‘옛일을 상고(詳考)하라’는 세종대왕의 말이 새삼 짙게 다가왔다.⊙

(*출처: 월간조선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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